넷플릭스에 공개된 애니매이션 <나의 행복한 결혼>을 소설 형식으로 리뷰합니다. 명문가의 딸로 태어났지만 계모와 여동생에게 학대 받으며 살아왔던 미요가 남편인 키요카를 만나 어떻게 새로운 인생을 펼쳐가는지, 미요의 1인칭 시점으로 만나보겠습니다.

그날 또 같은 꿈을 꾸었다.
흩날리는 벚꽃비 속에서 홀로 울고 있는 어린 아이를 그저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 나. 그 어린 아이는 바로 나였다.
어린 아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아이는 사라지고, 훌쩍 커버린 나만 남아, 벚나무를 바라보고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아끼시던 벚나무. 먹먹한 마음을 안고 벚나무를 올려다 보는데, 순간...
벚나무가 시뻘건 불길에 휩싸였다. 너무 놀라 비명 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사이모리 가의 저택이 불타 올랐다.
나는 사이모리가의 첫째 딸, 사이모리 미요.
하지만 나는 하인들과 다를 바 없다. 입는 것도 먹는 것도... 자는 것만은 작은 방을 홀로 사용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 부터 내 손에는 걸레나 빗자루가 들러 있었고, 작은 손은 바쁘게 움직였다. 집
안 곳곳의 여기저기에 묻은 먼지나 묵은 때를 벗겨냈다.
처음엔 하인들이 극구 말렸으나,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집안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라면서 말리지 않았으므로,
나는 이 일을 계속했다.
이 집에서 쓸모 있음을 증명해야 했다.
아침 차를 준비하는 것 또한 내가 해야 할 일 중 하나였다.
녹차를 정성껏 우려 다 같이 모여 있는 '또 하나의 사이모리' 사람들에게 내어갔다.
아버지, 새어머니, 그리고 여동생 카야. 그들은 함께 모여 앉아 견고한 막을 만들어 놓았다.
아무나 침투하거나 깰 수 없는.
"아이, 차가 너무 떫잖아! 이것도 하나 제대로 못하는거야?"
카야의 앙칼진 목소리. 녹차를 내어갈 때 마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카야.
처음에는 놀라서 찻잔을 떨어뜨렸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무덤덤해 졌다.
그저, 떫은 맛을 싫어하네... 정도만 속으로 생각할 뿐.
그럴 때 마다 새어머니는 내가 친어머니를 닮아 손 끝이 야무지지 못한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것 또한 매 번 똑같다.
아버지는 신문을 읽고 있다가 가볍게 타박하지만 새어머니의 기분을 상하게 할 정도는 아니다.
그저, 자신의 실수, 내 어머니와 결혼한 자신의 실수를 조금 인정해 버리고 만다.
그것 또한 매번 똑같다.
아침 일을 끝내면, 오후 부터는 그들에게서 멀어져 나 홀로 하인들의 눈치를 살피며 일을 거든다.
여느 때처럼 마당을 쓸고 있는데, 타츠이시가의 당주와 그의 아들이 코우지가 찾아왔다.
하녀들은 빨래를 하면서 그들의 방문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혼담 때문에 온 것이 아니냐고... 미요와 카야 아가씨 모두 혼기가 찼으니...
결혼... 이 집을 나갈 수 있는 기회...
"여기 있었네?"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코우지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코우지의 미소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나를 괴롭히려고 머리를 굴리는 사람들의 비틀린 미소가 코우지의 입가에는 서려 있지 않다.
이 집에 태어나 자라는 동안, 어려서 부터 종종 봐 오던 코우지였다.
새어머니가 이 집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둘이서 곧잘 놀기로 했었다.
"미요, 손 내밀어봐."
코우지가 내 손 위에 밀크 캐러멜을 올려 주었다.
"나, 이거 처음 먹었을 때 기절할 뻔 했다니까."
작고, 네모나고, 말캉한 단 냄새가 훅 끼치는 그것을 입에 넣었다.
세상에나...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코우지가 기뻐하며 말했다.
"와... 이렇게 웃다니... 네가 웃어준다면, 몇 번이고 가져다 줄게."
그 말이 고마웠다. 하지만 난 그 말에 어떤 대꾸도 하지 못했다.
말은 아끼는 편이 좋으니까. 난 뭐든지 실수 하니까.
"이런 시간이 계속되면 좋을 텐데... 난 널 돕고 싶어. 아직 부족하지만 네게 힘이 되고 주고 싶고... 항상 웃길 바라니까."
코우지의 말이 그 어느 때보다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아마도 '혼담'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날 밤, 아버지가 불러 찾아 뵈었다. 그곳에는 새어머니와 카야가 있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견고한 벽을 세우고서.
"보통 낮에는 무얼 하지?"
아버지의 질문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솔직해야 하는가... 거짓을 말해야 하는가...
청소를 해야 한다고 해야 할까? 책을 읽는다고 해야 할까?
"집 주변을 청소합니다."
"그렇다면 모레 점심 때는 반드시 집에 있어라."
집에 있으라니... 내가 이 집 밖을 나갈 일은 없는데...
아버지가 말씀하신 모레 점심 때가 되었다. 코우지가 왔다. 그날 따라 양복을 입고서.
내 입가엔 저절로 반가운 미소가 걸렸다.
"코우지씨."
"어... 미요..."
코우지는 나와 좀처럼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뭔가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수치심일까? 부끄러움일까?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는 나에게 다른 사람들과 나눠 먹으라면서 과자 상자를 건넸다.
"그럼 이따 봐."
본채 안으로 향하는 코우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도 모르게 기분이 조금 들떴다.
아버지께서 집에 있으라 했던 이유가 코우지 때문은 아닐까?
혼담... 이 두 글자가 다시 또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때 이후,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아버지께서 부르셨다.
나는 부리나케 응접실을 향해 뛰듯이 걸어갔다. 가는 길에, 거울에 얼굴도 한 번 확인했다.
얼굴에 더러운 것이 묻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없었다.
오후에 하녀들과 부엌에서 숯을 조금 칠해 그릇을 닦고 있다가 그을음이 묻었는데,
카야가 그것을 보고는 세수 좀 하라면서, 그 꼴로 손님을 맞는다면
가문의 수치가 된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가문의 수치가 될 순 없어...'
응접실로 가는 동안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기대하지 마... 괜한 기대를 해서는 안 돼... 분명히 나쁜 이야기일 거야.
코우지씨와의 혼담... 기대하면 안 돼. 안된다는 건 알지만...'
응접실 문을 열었다. 코우지가 카야 옆에 앉아 있었다. 가만히 문 앞에 앉아 아버지의 말을 기다렸다.
"코우지가 데릴사위로 들어와 사이모리 가문을 잇기로 했다. 안주인은 카야다."
그래... 그렇잖아. 이 집안에서 인정받고 평온하게 지낼 날은 쉽게 찾아 올리가 없어...
"미요, 너는 시집을 가거라. 혼처는 쿠도 가문이다."
놀란 내 얼굴을 보며 카야는 웃음을 잔뜩 참아내는 듯 얼굴을 실룩 거리더니, 밝게 말했다.
"와... 쿠도 키요카 님의 아내가 되는 거야? 그 유명한 쿠도 키요카라니...
언니가 그 집에서 며칠이나 버틸지 궁금하네."
나는 부들거리는 몸을 간신히 꼿꼿하게 하고 앉아 있었다.
누군가가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았다. 아마, 그것도 좋았을 것 같다.
"당장 짐을 꾸려서 내일 아침, 쿠도가의 저택으로 떠나라. 결례를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하고. 내 얘기는 끝났다."
아버지의 말이 가슴에 박혔다.
내일 아침... 내일... 당장...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후까지는 맑았는데, 느닷없는 폭우였다.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왔다. 어머니의 벚나무를 바라보았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베어져 남은 밑둥을...
'우울할 때 여기로 오면, 마음이 편안해 졌는데... 이제 여기도 못 오겠구나...'
"미요."
빗소리와 섞인 코우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코우지가 비를 흠뻑 맞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해... 난 정말 한심한 놈이야. 결국엔 아무것도 못했어."
"사과할 일 아니에요. 운이 나빴을 뿐이에요."
"이건 운 같은 게 아니야!"
"저는 괜찮아요... 시댁에서 행복하게 살지도 모르잖아요."
"내가 원망스럽지 않아?"
"원망이라니요... 그런 마음은 오래 전에 잊었어요."
"난 널 구하고 싶었어. 너와 함께 웃고 싶었어. 나는 너를..."
하지만 난 그 뒤에 올 말을 듣지 못했다. 카야가 집 안에서 우리 둘을 보고서, 코우지를 불렀기 때문이다.
코우지는 카야의 목소리에 움찔하며, 곤란해 하고 있었다. 인사를 건네야 했다.
"지금까지 고마웠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날 밤... 오랜 시간 나를 품어주었던 내 작은 방에서 짐을 꾸렸다.
보자기에 기모노 두 벌고 이가 빠진 빗 한 개를 넣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사이모리가에서 가져갈 것은...
어머니의 유품이라도 많이 남아 있었다면...
"미요 아가씨,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사이모리가에서 가장 오래 일을 했던 하녀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희끗해진 머리, 주름진 손... 이제 그녀와도 마지막이구나.
"주인 어른께서 내일 아침 출발할 때 입으라 십니다."
그녀가 내 쪽으로 곱게 접힌 기모노를 밀어주었다. 파란색에 노란 꽃 문양으로 채워진 기모노...
이런 화려한 기모노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잘 들으세요, 미요님... 쿠도 키요카님은 냉혹하고 무자비한 사람이랍니다.
모든 약혼자가 달아날만큼... 부디 몸 조심하세요."
그리고는 나의 단촐하다 못해 초라한 짐꾸러미를 보고는 울음을 참는 듯 하다가, 도시락을 내밀었다.
"가는 길에 드세요."
그녀의 마음씀이 고마웠다.
사이모리가에서 아주 오랜만에 받은 그리고 마지막일 따뜻함이었다.
다음 날 아침, 새 기모노를 입고, 문 밖을 나섰다. 거울 따윈 보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아름답게 보일 필요가 있을까?
폐만 되지 않는다면... 쫓겨나지만 않는다면...
저택 안은 고요했다.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것 처럼.
하인들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아버지도.
누구의 배웅도 받지 못한 채,
빌붙어 살던 고양이가 몰래 집을 나가는 것처럼... 사이모리가를 떠났다.
'난 이제 집도 추억도 잃게 됐구나.'
쿠도 가로 향하는 길은 전차 안에서 그저 멍하니 창 밖을 보다가, 도시락을 먹다가 그러다가는 사이모리가 안에서 겪었던 서글픈 일화들을 반추하면서 흔들릴 뿐이었다. 설렘보다는 서글픔이었다.
쿠도 가는 숲 속 길 안 쪽에 있었다.
푸른색을 뽐내는 나무들과, 새들의 지저귐... 그리고 벌레들의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는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저 곳이 쿠도 가문의 당주가 사는 곳인가...'
눈에 들어온 저택은 생각보다는 아담했다.
문 앞에 이르니 '쿠도'라는 명패가 보였다.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안 쪽에서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이쪽 편의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이 벌컥 열렸다.
작고, 여전히 호기심에 눈빛이 반짝이는 노파가 서서 나를 바라봤다.
"사이모리 미요 라고 합니다. 혼담이 들어와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그 노파는 활짝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다며 나를 안 쪽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내 이름은 유리에에요. 반가워요. 도련님께서는 서재에 계십니다."
유리에는 나를 서재로 이끌었다.
이렇게 도착하자마자 당주님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에, 당황했다.
실수하지 말아야지... 절대로... 절대로...
유리에가 서재문을 열었다.
"도련님, 미요 아가씨가 오셨어요."
나는 눈을 살짝 들어, 쿠도 키요카라는 남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책상 앞에 앉아 무엇인가를 적어내려 가고 있었다.
그의 넓은 어깨로 창문에서 쏟아진 빛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처음뵙겠습니다. 사이모리 미요라고 합니다."
나는 엎으려 절을 하고 그대로 있었다.
그런 내 머리 위로, 후... 하고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떨어졌다.
'뭐지...? 또, 내가 뭔가 실수를 한 건가?'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셈이지?"
"죄... 죄송합니다!"
고개를 들었다. 어느 새, 남자는 몸을 돌려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쿠도 가문의 당주 쿠도 키요카다."
나직하게 울리는 저음...
하지만 그 목소리와는 묘하게 어울리지 않는 듯한...
하얗고, 날카로운 얼굴... 은발인듯, 금발인듯... 길게 내려 뜨린 머리카락....
너무나 아름다운 남자가 거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