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 공개된 애니매이션 <나의 행복한 결혼>을 소설 형식으로 리뷰합니다. 명문가의 딸로 태어났지만 계모와 여동생에게 학대받으며 살아왔던 미요가 남편인 키요카를 만나 어떻게 새로운 인생을 펼쳐가는지, 미요의 1인칭 시점으로 만나보겠습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문득 치밀어 올랐다.
그러자 불안의 기운이 스멀스멀 온몸을 감쌌다.
하지만 눈을 감았다 뜨면, 이곳은 쿠도가의 저택이고, 난 아늑한 내 방에 누워 있었다.
나리와 외출하고 돌아온 그날 밤, 꿈을 꾸었다.
현재의 내가, 어머니와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 내가 보았던 모습처럼 젊었다.
"기다려 주세요, 신이치님! 그게 아니에요!"
어머니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뭐가 아니란 말인가, 스미?"
아버지의 차가운 목소리에 어머니는 결심한 듯 말씀하셨다.
"미요는..."
그 말을 자르는 아버지의 날카로운 말들...
"이능을 타고나지 못했지. 그리고 생길 기미도 보이지 않아."
"부디 미요를 버리지 마세요."
"우리 가문이 이능과 무관한 보통 집안이었다면 당연히 사랑해 줬을 거야."
어머니는 아버지 발치에 엎드린 채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매몰차게 돌아섰다.
"미안하다, 미요... 내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널 지켜 줄 수가 없구나."
어머니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하지만 괜찮을 거야... 네가 좀 더 자라면...."
그 순간, 눈을 떴다.
어머니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한 채.
아직 새벽이었다.
그날 아침은 여느 때와 같이 평화로웠다.
나는 설거지를 하고 있는 유리에의 등에 대고 머뭇대며 말했다.
"저... 뭔가 상의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유리에는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언제나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본다.
"나리께 선물을 받았으니... 나도 뭔가... 선물을 하고 싶은데..."
"어머나!"
유리에는 기쁜 소식이라도 들은 것처럼 펄쩍 뛰면서 하고 있던 설거지도 그냥 두고 나를 이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예산이 정말로 적어서... 나리께서 흡족해하실 선물을 살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유리에는 별 걱정을 다 한다는 투로 말했다.
"굳이 비싼 선물을 살 필요 없이 직접 만들면 되죠."
"직접요?"
"도련님께서 평소에 자주 쓰시는 물건은 어떨까요?"
유리에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와 내밀었다.
"미요 님께서 만드신 거라면 뭐든지 좋아하실 거예요."
책장을 한 장 넘겨 보았다.
그 안에는 셔츠와 치마 등등을 직접 만들 수 있는 도안과 디자인이 담겨 있었다.
신중하게 책을 넘겨 보다가 한 곳에 눈길이 멈췄다.
"와아... 멋진 머리끈이네요."
유리에가 감탄했다. 내 머릿속 어딘가에서 내가 만든 머리끈을 하고 있는 나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머리칼 마저 아름다운 나리의 머리칼이 내가 만든 머리끈 아래에서 바람에 흔들렸다.
"저... 이걸 만들어 볼래요."
마음이 들떠, 그날을 그냥 보낼 수 없었다.
출근 준비를 하는 나리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기... 나리..."
"뭐지?"
제복을 갖춰 입은 나리가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오늘 잠시 집을 비워도 될까요?"
"왜?"
"사고 싶은 물건이 있어서요."
"혼자 가려고?"
"유리에 씨 하고요."
나리가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쉬는 날이면 내가 같이 갈 수 있을 텐데."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나리와 가까이 있으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괜찮습니다."
"그러면 다녀와."
그러면서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낯선 사람 따라가지 말고."
그 말에 풋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세상 물정을 제대로 모르긴 하지만 난 어린아이가 아닌데...
하지만 나리는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나에게 부적을 건넸다.
"항상 몸에 지녀야 해."
"고맙습니다."
"정말로 알아들은 거지?"
나리의 얼굴이 훅 하고 내 얼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네..."
"흠..."
나리의 숨이 느껴졌다.
"다녀올게."
나리가 떠나자, 나는 부적을 품에 넣고 외출할 준비를 서둘렀다.
유리에와 함께 나리와 나란히 걸었던 길을 걸었다.
날은 맑았고, 역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모두들 웃고 떠들고 있었다.
그 사람들 사이에 내가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실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상점으로 들어갔다.
아름다운 실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었다.
'나리는 어떤 색이 어울릴까?'
한참 색을 고르고 있는데, 저절로 손길이 보라색으로 향했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색... 나는 실을 손에 들고 기대에 찬 채 유리에를 바라보았다.
"고운 색을 골라서 다행이네요."
유리에가 말했다.
"네, 빨리 돌아가서 만들고 싶어요."
도저히 기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가게 밖을 나와 돌아가려는데, 유리에가 곤란한 듯 말했다.
"소금이 떨어진 걸. 깜빡했네요."
"제가 다녀올게요."
"아니에요, 이건 제 일인걸요.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유리에가 골목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작게 숨을 쉬며, 보라색 실이 들어 있는 작은 가방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빈정거리는 목소리...
"어라, 언니잖아?"
카야였다. 옆에는 코우지가 있었다.
카야는 코우지의 팔짱을 끼고, 미소를 띠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언니."
카야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숨이 막혀 왔다.
"어머나, 언니가 아직 살아 있다니 깜짝 놀랐어."
내가 살아 있어... 아쉬운가?
"아... 근데... 여전히 하인 차림으로 다니는 걸 보니, 쫓겨난 모양이구나."
아니... 그렇지 않아... 하지만 그 말들은 입 속에서만 맴 돌뿐이었다.
"흐흐흐... 가여워서 어쩜 좋아."
보잘것없는 내 모습... 사람들 눈에는 여전히 그렇게 보이겠지? 나리에게도...
"카야, 그러지 마."
코우지가 말렸다. 하지만 그 조차 카야의 말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려서부터 반푼이인 언니는 쿠도 님과 어울리지 않는걸요."
맞는 말... 가장 아픈 말...
"그러니까 쫓겨나는 것도 당연지사 아니겠어요?"
온몸이 축 가라앉는 것 같았다.
땅 밑으로 누군가 나를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런 의지도 없이, 그저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목숨이라도 건졌으니 다행이지."
카야는 나를 질질 끌고 어디로 가는 걸까? 어디에 내동댕이 치려는 걸까?
"그만하고 가자, 카야."
"코우지 씨는 가만 계세요!"
"차라리 죽길 바랄 정도로 호되게 당한 거지? 난 상상도 못 하겠어."
카야는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귓가에 속삭였다.
"돈이 궁하면 말해.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애원한다면 한 번 생각해 볼 테니까."
카야의 목소리가 귀에 닿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무참하게 나를 할퀴었다.
"또 입을 꾹 다물고 있네. 언니는 어딜 가든 변함없구나."
나의 입은 나를 배신했다.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와 버렸으니...
"죄... 죄송합니..다.."
그때, 유리에의 목소리가 구원처럼 들려왔다.
"미요 님! 오래 기다리셨나요?"
유리에는 나와 함께 있는 두 사람을 보고선 말했다.
"미요 님의 지인들이신가요?"
카야의 당당한 목소리가 울렸다.
"안녕하세요, 저는 사이모리 카야라고 해요. 언니가 신세 지고 있습니다. 혹시 언니의 동료분이신가요?"
"제가 미요 님의 동료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미요 님께서는 쿠도 가문의 안주인이 되실 분인 걸요."
유리에의 말에 카야가 놀란 듯 눈을 끄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안주인이라고요?"
"그럼요,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유리에라고 합니다. 미요 님을 모시고 있죠."
카야의 비틀린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나... 쿠도 님께서 사람이 좋으신 건지 별나신 건지 모르겠네요."
카야의 말이 듣기 싫었다. 하지만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진작 쫓겨난 줄 알았거든요. 역시 풍문은 믿을 게 못되는군요."
유리에가 공손한 어투로 말했다.
"그럼... 저희는 다음 일정이 있어서... 실례하겠습니다. 미요 님, 가시죠."
유리에가 나를 이끌어 주는 덕분에 나는 겨우 발을 뗄 수 있었다.
내 어깨를 감싸 안은 유리에의 손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어쩌면 그 떨림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일 수도 있었다.
집에 돌아왔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나리를 위해 산 실도 책상 위에 그대로 둔 채, 난 멍하니 천장만 볼뿐이었다.
"미요 님, 차를 내어 드릴게요."
유리에가 챙겨주었지만 나는 괜찮다고 말할 뿐이었다.
나는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싫었다. 나는 내가 싫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는 내가...
너무 작게 느껴졌다.
저녁에 나리가 돌아오셨다.
나와 유리에는 현관에 나가 나리를 맞았다.
나리는 축 쳐져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놀라는 듯했다.
"무슨 일 있었나?"
어떻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초라한 모습을...
"아니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나리는 더는 물어보지 않고, 그의 방으로 향했다.
나는 멍청하게 일어서서 텅 빈 눈으로 내 방으로 걸었다.
그날 밤, 달이 높게 떴다. 부끄러운 내 모습을 비추듯이...
나는 방 안에 틀어박혀 벽에 몸을 기댄 채, 머릿속을 비우고 있었다.
무엇을 비워야 하는지도 모른 체...
"나야... 얘기 좀 할까?"
나리의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한 가지만 말할게... 네가 안고 있는 고민거리는 곧 깨끗이 사라질 거야. 그러니 너무 속 끓이지는 마."
울컥, 눈물이 나려 했다.
하지만 흐느끼는 소리를 나리가 듣게 하고 싶진 않았다.
꾹 참아 내며, 나리의 말을 기다렸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생긴다면 언제든 들어줄게."
나리가 복도를 걸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요...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책상 위에 놓아둔 실뭉치를 들었다.
머리끈 틀에 맞춰 실을 꿰면서 밤새 생각했다.
이렇게 있어도 되는 것일까? 이런 식으로 나리의 곁에...
다음 날, 아침.
나는 완성된 머리끈을 손에 들고 또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도저히 전해 줄 수 없을 것 같은 머리끈...
"미요님,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
유리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문을 열고, 유리에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내비쳤다.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손님...? 나에게...?
그리고는 유리에가 조금 더 문을 열었다.
"하나...?"
분명 하나였다.
사이모리 가에서 유일하게 나의 편이 되어 주었던...
"오랜만에 뵙습니다, 미요 아씨."
"하나!"
나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나를 향해 미소 짓는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잔뜩 상처 입고, 하나를 향해 달려갔던 그때...
우리는 차를 두고 마주 앉았다.
"잘 지내신 것 같아 다행이에요."
하나는 잔잔하게 미소 지으면 나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고마운 존재였던 하나...
하지만 나 때문에, 사이모리가에서 쫓겨나고... 언제나 걱정했는데...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하나가 말했다.
"저 결혼했어요. 이제는 아이도 있고, 소박하지만 행복하게 산답니다."
"다행이야..."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는 항상 행복하게 웃는 아씨를 보고 싶었어요. 저는 그 일이 있고, 본가로 돌아갔어요."
미안해 하나... 행복하게 웃어주질 못해서...
"아씨는 지금 행복하신가요?"
"난... 그럴 자격이 없어... 나에게는 이능이... 견귀의 재능조차 없는 걸..."
나는 나의 가슴 깊숙하게 숨겨 놓았던 두려움을 꺼내 보였다.
"그러니 나리의 아내가 될 자격도... 행복해질 자격도 없어..."
하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편지 한 통을 꺼냈다.
"아씨, 제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아세요? 처음 편지를 받았을 때는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답니다. 다른 세상 분이시니까요."
하나가 편지를 나에게 건넸다.
나는 편지를 받아 들고, 반듯한 글씨를 바라보았다.
앞면에 '카나오 하나' 님께 라고 적혀 있었고, 뒷면에는 '쿠도 키요카'라고 적혀 있었다.
"나리께서...?"
하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째서..."
나는 편지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나리께서 다 아셨던 거야? 능력 있는 카야와는 달리 견귀의 재능도, 이능도 없는 내겐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어. 나리께 사실을 털어놓았다가 이 행복을 놓칠까 봐 두려웠고, 모든 걸 아시면 분명히 날 버리실 거라고... 행복은 사라질 거라고..."
나 혼자 악몽을 만들다 부수고, 행복을 만들다 버리고 했던 것이다. 바보처럼...
"아씨, 쿠도 님은 사정을 다 아시고도 약혼자를 위해 편지를 쓰셨어요. 아주 조금만 용기를 내 보세요. 아씨라면 할 수 있어요."
하나의 따뜻한 말에 고개를 들었다.
나를 응원하는 사람이 내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
하나뿐만 아니라 유리에도...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내 뒤에 있다.
"고마워, 하나. 나도 노력해 볼게."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되었다.
나리께서 내 보이신 정성에 답을 해야 했다.
마음에 대한 답을 늦추면 후회가 된다. 언제나... 그랬듯이.
밤새 만든 머리끈을 들고 나리의 방으로 향했다.
나리는 고요한 얼굴로 신문을 읽고 계셨다.
"갑자기 어쩐 일이야?"
몸에 힘을 준 체 전투적으로 서 있는 날 보며 나리가 말했다.
"나리. 저는 그동안 나리께 말씀드리지 못한 게 있습니다. 저에게는 이능이... 견귀의 재능이 없어요. 친정에서는 하인으로 일했습니다. 명문가 아가씨다운 일은 무엇 하나 할 줄 몰라요. 저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일부러 사실을 숨겨 왔습니다."
나는 숨을 내뱉고 말을 이었다.
"죽으라 하시면 죽을 게요. 떠나라 하시면 떠나겠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요."
그 말을 하고서 바닥에 몸을 엎드렸다.
"함께 시내로 외출했던 일부터 선물로 주신 빗까지... 감사드릴 일이 얼마나 많은 지 몰라요."
나는 머리끈을 내놓았다.
"제 마음을 담아 직접 만들었습니다. 필요 없으시다면 버리시든 태우시든 상관없어요."
그리고는 비장하게 물었다.
"나리의 결정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영원처럼 느껴지는 잠깐의 침묵.
나리가 신문을 접었다.
"언제까지 엎드려 있을 거야?"
"...!"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리가 했던 말. 나는 고개를 들어 나리를 바라보았다. 나리는 어느새 내 가까이 와 있었다.
"네가 떠나면 내가 곤란해. 이제 곧 정식으로 약혼해야 하니까."
약혼...
나리가 나를 가만히 안았다.
"나와 이곳에서 지내는 게 싫은 건가?"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 저는 이곳에 있고 싶어요... 나리께서 허락해 주신다면요."
"허락이 왜 필요해."
나를 안은 나리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널 필요로 하는 사람은 바로 나인걸. 다른 누구도 아니야."
"나리..."
나리의 품은 너무 넓고 포근해서 나의 미운 마음을 모두 덮고도 남을 것 같았다.
나리는 내가 만든 머리끈을 보며 말했다.
"미요, 이걸로 내 머리카락을 묶어 주겠어?"
나는 나리의 고운 머리칼을 손으로 쓸었다.
어떤 비단 보다도 부드러웠다.
나리의 길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보랏빛 머리끈에 묵였다.
"고마워, 소중히 잘 쓸게."
나리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이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건... 내가 만든 환상이 아니었다.
노을이 지는 저녁, 나리와 함께 나와 하나를 배웅했다.
나리는 하나를 위해 자동차를 준비해 주었다.
나리의 부하 직원인 고도 씨가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나를 보고 찡긋 웃는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하나... 정말로 고마워."
나는 가만히 하나의 손을 잡았다.
하나의 다른 손이 그 위를 덮었다.
"널 만나지 못했다면... 네가 깨우쳐 주지 않았다면... 아직도 틀어박혀 있었을 거야."
"도움이 되었다니 영광입니다. 저도 아씨를 봬서 좋았어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나가 차에 올라타, 창문을 내리며 말했다.
"쿠도 님,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미요 님도 행복하세요."
나는 떠나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리는 내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리며 말했다.
"너무 섭섭해하지 마. 이제 언제든 만날 수 있으니까."
"나리, 고맙습니다."
"고맙기는."
우리는 함께 바람을 조금 맞으며 서 있었다.
바람에 나리의 머리칼이 날렸다.
내가 묶어 놓았던 보라색 머리끈 때문인지 그의 얼굴이 더욱 또렷하게 눈에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