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풀의 웹툰 <무빙>이 드디어, 드라마로 나왔다. 디즈니 플러스에서 릴리즈 되고 있다. 시즌 1은 총 20부작이며, 장르는 슈퍼히어로, 액션, SF, 스릴러, 판타지, 미스터리, 첩보, 로맨스, 어드벤처, 휴먼, 드라마, 학원, 고어, 초능력, 시대극이다. 정확히 나무위키에 정리된 장르의 정보 순서다. 그러나 나에게 이 장르 중에서 굳이 한 장르를 골라보라면 드라마 <무빙>은 판타지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드라마 속에 나오는 부모들 때문이다.
드라마의 가장 강력한 스토리 라인은 초능력을 숨긴 부모들과 그들의 능력을 물려받은 자식들 사이의 애틋함이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는 부모들이 초능력을 숨긴 채 왜 숨어 살게 되었는지를 그려내고, 초능력을 가진 자식들은 부모의 희생을 피부로 느끼며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펼쳐 나가면 좋을지 고민한다. 가족 안의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분열되지 않고, 함께 한다. 요즘 세상에 그것은 가족 판타지에 가깝다. 하지만 판타지적 요소를 더욱 강화하는 것은 부모들이 자식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모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다." 우리는 그 말을 진실이라 믿으며 살아간다. 그들이 비록 자식을 억압하거나, 폭행하거나, 비웃거나, 깔아뭉갤 때에도 우리는 흔히 '그럴 만한 이유'를 찾곤 한다. 방식이 잘못되었지만 그 안에는 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걱정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먼 옛날 공자 님이 말씀하신 바 있다. "부모는 그저 자식이 아플까 봐 걱정이다." 부모는 자식이 몸이 상하고, 마음이 다쳤을 까봐 늘 언제나 노심초사한다는 말이겠다. 조금 더 확장하면, 부모의 역할은 딱 그 정도라는 것이다. 자식이 가야 할 길을 직접 내어 주거나, 자식 앞에 놓인 잡풀 들을 직접 제거하거나, 험한 길 위에 내팽개쳐 놓고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라고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걱정만을 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부모가 된 자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오지랖을 떨지 말라는 것이다. 공자 님 말씀을 너무 제멋대로 해석했다고 보는가? 그렇다면 그건 공자 님 말씀을 빌어 내가 말하고 싶은 부모의 자세가 그러해야 한다는 것으로 주장한 것이니 이해해 달라.
하지만 세상 어느 부모가 그러한가? 자식을 위해서 목숨을 초개처럼 바치고, 자식의 앞날을 끊임없이 응원하며, 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도 꾹꾹 참고, 자식이 쓰러져도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며, 오로지 '네가 아플까만 걱정이다.' '언제나 너를 사랑한단다.'라는 말을 하는 부모는 드라마 속에나 등장한다. 그래서 역시나 <무빙>에서도 그러한 부모가 등장한다. 그들은 자식을 위해서 기꺼이 국정원 요원이라는 삶을 포기했으며, 숨어 살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 만큼 희생하고 있으니 너도 그에 부합하는 삶을 제발 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자식 또한 초능력자이기 때문에 초능력 선배로서 훈수 두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도 말이다. 그런 부모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나는 단언컨대 없다고 확신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드라마의 장르는 가족 판타지다.
그럼 주요 캐릭터와 부모들의 모습을 한 번씩 짚어보면서 어떤 면에서 그러한 지 조금 더 세심하게 살펴보자.
1. 아이오와 출신의 프랭크
드라마의 초반부를 장식하는 것은 '프랭크'라는 인물이다. 그는 은퇴한 초능력자들을 제거하는 임무를 띠고 미국에서 넘어온 자이다. 이름은 프랭크이지만 한국 출신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 외국으로 넘어갔기에, 한국말은 능숙하지 않다. 게다가 그는 초능력이 있는데, 바로 힐링팩터 능력자다. 칼에 베이거나 총에 맞아도 회복 능력이 어마어마하게 빠르다. 그는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과거 국정원의 블랙 요원이었던 자들을 하나씩 제거한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묘한 공통점을 발견한다. 은퇴한 요원들이 자신의 능력을 숨기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과, 그들의 자식들이 모두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요원들이 끔찍하게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자식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프랭크의 마음을 흔든다. 플래시백으로 그려지는 그의 과거는 처참했다. 프랭크는 어린 시절 미군 부대에서 노래하는 엄마를 두고 자랐다. 어린 그의 눈에 비친 어머니는 아름답고, 다정하다. 그의 눈에는 엄마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어느 날, 누군가에게 붙잡혀 끌려간다. 그 모습을 보고도 어머니는 계속 노래를 부른다.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아이오와 주 옥수수 밭에 갇힌 그는 자신의 또래들과 같이 혹독한 훈련을 거친다. 생존 훈련이다. 누군가를 죽여야 살아남는 훈련이었다. 누군가를 죽이고, 간신히 살아남아 프랭크라는 이름을 받고, 미 정보부에 입양되어 인간 병기로서 살아왔다.
그런 삶을 살아왔던 그에게 은퇴자들의, 자식을 향한 투철한 사랑과 보호 본능은 그가 가지지 못했던 부모의 사랑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닫게 해 준다. 그의 정체를 눈치챈, 구룡포에게 처참하게 당한 것 또한 그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의 능력이 구룡포에 비하여 떨어져서 당한 것이 아니라, 자식을 지키기 위해 눈을 켜고 덤벼드는 구룡포를 마음으로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2. 봉석의 부모
봉석은 비행능력자다. 조금만 마음이 떨리거나 벅차오르면, 붕 떠버린다. 누가 제어하지 않으면, 대기권 밖으로 나가 버릴 정도로 붕붕 뜬다. 그런 아이를 사람들의 시선과 무엇보다 국정원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부모는 시골에서 농장을 하면서 키운다. 그러나 봉석의 아버지가 국정원에 발각된다. 아버지 문산(코드네임) 또한 비행능력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활약으로, 봉석과 어머니 미현은 몰래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고, 아버지의 생사도 모른 체, 살아간다.
미현은 초감각이 있다. 누구보다 잘 보고, 잘 듣는다. 하지만 초반에는 두려움이 많았다. 자꾸만 떠오르는 봉석을 땅으로 내려놓기 위해 다 큰 아들을 업고 다닌다. 자신의 남편처럼 언제든지 어디론가 떠나버릴 것만 같아 두렵다. 하지만 그 두려운 마음이 자신과 봉석의 삶을 갉아먹고 있음을 일찍이 깨달은 그녀는, 봉석을 땅에서 살 수 있도록 훈련시킨다. 하지만 여전히 두렵기 때문에 봉석을 살찌우고, 두 다리에는 엄청난 무게의 족쇄를 채우게 하지만. 그러나 봉석이 "나도 날고 싶다."라고 선언한 순간, 미현은 아들을 붙잡아 둘 수 없음을 깨닫는다. 대신에 어떻게 하면 다시 땅에 잘 떨어질 수 있는지, 그것을 고민한다. 그녀의 최종 목표는 봉석의 행복이다.
3. 희수의 부모
희수는 힐링팩터 능력자다. 어렸을 적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었는데, 그 사고에 그녀 또한 있었다. 엄마는 죽었지만, 그녀는 살았다. 하지만 한 동안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몰랐다. 열여덟이 될 때까지. 불합리하게 일진들에게 당하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상황을 외면했다. 나 하나만을 보고 살아오신 아버지의 삶에 누가 되고 싶지 않아서. 그녀는 착한 딸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참지 못한 순간이 왔다. 그 순간을 참고 계속 살 자신이 없을 때, 그런 자신의 모습이 문신처럼 피부에 들러 붙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 그녀는 일진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녀는 싸움을 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돌에 맞아도 회복되었고, 그 어떤 고통도 스쳐 지나갔다.
희수의 아버지는 구룡포(코드네임)다. 그 또한 힐링팩터였고, 블랙요원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활동 중 차세대 능력자들을 확보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순간, 모든 것을 버리고 딸을 데리고 숨어 버린다. 딸을 지키기 위해서. 엄마 없이도 밝고 씩씩하게 자라준 딸에게 조금이라도 더 무엇인가를 해주기 위해서 몸을 쓴다. 다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어떤 험한 일을 해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족이 없을 때의 그는 조폭 칼받이였고, 교통사고 사기범이었다. 하지만 딸이 있으므로 그는 자해하는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구룡포는 희수가 일진들을 폭행하고 퇴학당했을 때, 나무라지 않는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전 재산을 합의금으로 날렸을 때도 왜 그랬냐고, 술을 마시며 푸념하지 않았다. 그가 걱정하는 건, 전학 간 딸의 교복을 맞춰 주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것뿐이다. 자신이 쌓아 온 모든 것을 자식을 위해서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부모가 있을까?
4. 강훈의 부모
강훈은 신체능력자다. 초인적인 힘과 스피드를 가지고 있다. 그런 능력은 아버지 재만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재만은 지적장애를 갖고 있다. 그는 아들 바보다. 늘 강훈이 걱정뿐이다. 동네 슈퍼마켓을 하는 그는, 가게 앞 평상에 앉아 늘 강훈이를 기다린다. 강훈이가 오면 그제야 일어선다. 그가 일어선 평상 자리엔 엉덩이 자국이 나 있다. 오랜 세월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자가 남긴 흔적이다. 그래서 그의 뇌관을 탁 건드리는 것 또한 강훈이다. 강훈이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거나 하면 그는 앞 뒤 제지 않고 뛰어간다. 강훈을 기다리며 자신의 모든 삶을 보낼 것 같은 인물이라서 마음이 아프다.
봉석, 희수, 강훈의 부모들은 철저히 자기희생적이다. 하지만 그들의 삶이 초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능력자이기 때문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자식을 지키겠다는 목표가 있고, 자신들과 같은 험난한 삶을 살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가 있다. 하지만 자식이 능력을 발휘하고 문제를 일으키면 자식을 탓하지 않는다. 그들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자신의 과오를 깨닫는 순간, 인정하지 않고 덮어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인정하고, 자식이 원하는 방향하고 날아갈 수 있도록 응원한다. 이러니 판타지가 아닌가. 누구나 부모에게 가장 바라는 판타지적 모습. 그러나 <무빙>을 보고 있으면, "현실은 저렇지 않다고욧! 쯧쯧쯧..." 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저 보게 된다. 그리고 부모의 모습 속에 묘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가질 수 없는 것에 더 이끌리지 않는가. 이제 곧 <무빙> 시즌 1이 끝난다. 나는 누구보다 간절하게 시즌 2를 갈망한다. 부모가 내어 준 날개를 자식들이 어떻게 조종하면서 살아갈지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판타지를 보면서 대리만족 하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