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한 번 마라탕을 시켜 먹는다. 주로 목요일 저녁이다. 마라탕을 접하기 전의 목요일은 금토일을 만나기 위해 거쳐야 할 하루 중 하나였다. 아니, 그 보다 못했다. 왜냐하면 월화수는 일주일 초반이라 열심히 달려야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요일에 딱 브레이크가 걸린다. 몸은 늘어지고, 아직 주말은 먼 것 같고... 그런 때에 마라탕이라는 음식을 만났고, 힘을 내기 위해 뜨겁고, 매운 마라탕을 시켜 먹기 시작했고, 그것을 먹으며 영화를 보기 위해 넷플릭스를 뒤적이는 것이 목요일의 주요한 이벤트가 되었다. 마라탕을 먹으면서 볼 영화는 몇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첫째, 미친듯이 웃기지 않을 것.
둘째, 나름 만족스러운 해피 엔딩일 것.
셋째, 너무 길지 않을 것.
이 조건 들은 마라탕과 맥주 한 두 캔의 섭취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즐겁게 식사와 영화 감상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것이다. 전에 한 번 엄청나게 웃긴 주성치 영화를 보면서 마라탕을 먹다가, 국물이 목구멍에 잘못 넘어가 거의 죽다 살아났다. 마라탕을 먹을 때는 적당히 웃기고, 적당히 감동적이어야 하며, 식사와 함께 영화가 끝나야 한다. 마치 디너쇼처럼.
아래는 마라탕을 먹으면서 보기 좋은 영화들이다.
1.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뉴욕대학에서 최연소 경제학 교수가 된 레이첼 추. 그녀에게는 싱가포르에서 유학온 남자친구가 있다. 그의 이름은 닉 영. 어느 날 닉은 가족 행사 때문에 고향에 가야 한다고 한다. 닉은 레이첼에게 함께 가자고 청한다. 레이첼은 닉과 함께 싱가포르로 가는데, 그곳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바로 닉이 미치도록 재력이 넘치는 영 가문의 후계자라는 사실! 나름 미모에 학식까지 갖췄다고 하지만 닉의 어머니는 레이첼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은근하에 엿을 먹이기 시작한다. 레이첼은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 속에서 과연 똑바로 설 수 있을까? 닉과는 헤어지지 않고, 행복한 결말을 맞이 할 수있을까?
당연히, 이루어진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남녀 주인공이 끝내 헤어지는 결말을 맞이 한다면 그야말로 크레이지다. 로맨틱 코미디는 해피 엔딩으로 가는 과정이 재미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재미있게 해 주는 것은 두 사람이 깨볶는 에피소드나,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맞는 에피소드 뿐만 아니라, 그들 주변에 있는 조연들의 활약이다. 이 영화는 주연들 만큼이나 조연들의 역할마저 드라마에 적절하게 어우러지면서, 딱 맞춤하게 즐거움을 준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볼거리는 어떠한가. 제목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다. 돈 많은 아시아인이 얼마나 화려하게 살 수 있는 지 보여준다. 하지만 그러한 삶을 천박하게 그리지는 않는다. 불편하지 않게, 딱 적당히. 영화에서 아시안인을 편의점이나 세탁소 밖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무척 반갑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들의 삶은 멋지다. 하지만 그 안에는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고, 성공과 불안이 함께 한다. 그것을 진지하게 건드리지는 않지만, 주인공들이 결말로 가는 과정에서 제대로 징검다리 역할을 해준다. 보고 나면 행복해지는 영화.
2. 우리 사이 어쩌면
로맨틱 코미디를 보고자 할 때, 매우 중요한 부분은 남녀 주인공의 외모라 할 수 있다. 짧은 시간 안에 서로 사랑에 빠지려면 '납득'이 되어야 한다. 그 '납득'을 하게 만드는 것이 외모라 할 수 있다. 영화 <우리 사이 어쩌면>은 그런 의미에서 그냥 걸러 버린 영화였다. 내용 또한 진부했다. 어렸을 때 부터 친구 사이였던 두 사람이 한 동안 연락도 않고 지내다가 고향에서 다시 재회하여 사랑에 빠지는... 이러한 내용의 영화를 그 동안 대략 열 편 정도는 본 것 같다.
그러다가 한 번 봐 볼까? 했던 이유는 앨리 웡 때문이었다. 넷플릭스를 통해 영어 공부나 해 볼까, 해서 스탠드 업 코미디를 검색해 보다가 앨리 웡의 스탠드 업 코미디를 보게 되었고, 그녀의 매력에 푹 빠졌다. 엄청 촌스런 외모이지만 점점 귀여워 보인달까?
잠깐 보다가 재미 없으면 다른 걸로 봐야지 하다가 결국 끝까지 다 봐 버렸다. 정말 깔깔 거리면서. 이유는? 보면 알겠지만 각 에피소드의 상황이 클리셰 덩어리지만 재치있게 마무리 되었고, 갑작스럽게 등장한 배우 '키아누 리브스'의 열연 때문이었다.
로맨틱 코미디를 보면서 깔깔 낄낄 거렸던 것이 얼마 만 이었나? <아이 필 프리티>를 볼 때도 이렇게 까지 웃지는 않았다. 남녀 주인공의 외모가 천상계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인간계여서 볼 맛이 안 날 거라는 것도 철저한 오해였다. 남자 주인공 랜달 파크는 전혀 '내 남자' (로맨틱 코미디의 남자 주인공은 런닝 타임 동안은 내 남자 여야 한다) 스럽지 않았는데, 영화 끝에 가서는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하는 매력을 지녔다. 로맨스와 코미디를 함께 버무린 영화를 보고 싶다면, 이 영화가 재격이다.
3. 리바운드
뭔가를 먹으면서 영화를 본다면 당연 한국 코미디 영화가 좋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막과 화면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니까. 예전에는 <신세계>류의 스릴러나 액션영화를 보고는 했는데, 한 가지 안 좋은 점은 이런 영화들의 런닝 타임이 두 시간을 넘는게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먹고 마시면서 이런 영화를 보면 늘 다 먹고도 한 참을 봐야 하는데, 다 보고 나면 치우는게 너무나 싫어진다. 이미 시간은 늦어 버렸고, 나는 이미 소파와 너무나 깊이 사랑에 빠진 상태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따라서 한국 코미디 영화가 좋다.
<리바운드>의 장르가 코미디인가? 굳이 따지자면, 휴먼 드라마 장르일까? 코미디와 휴먼 드라마의 경계에 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뭔가를 열심히 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부담없이 응원하는 마음으로 볼 수 있도록 코미디적인 요소를 풍기는 영화라고 풀이해 볼 수 있겠다.
<리바운드>는 내가 최근에 마라탕을 먹으면서 본 영화인데, 꽤 만족스러웠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정도는 알고 봤는데, 세세한 실화를 알지 못해도 보는데 불편함이 없었다. 특히, 마지막 경기에서 Fun의 'We are young'이 흐르는 가운데, 이 마지막 경기가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주며, 배우들과 실존 인물을 겹쳐 주는데, 묘한 감동이 있었다.
덕분에 영화를 다 보고, 'We are young'을 흥얼 거리며 마라탕과 맥주 캔의 분리 수거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저녁을 보냈다.
이번 주 목요일... 마라탕과 함께 볼 영화는 뭐가 있을까? 적당한 로맨틱, 코미디, 감동, 두 시간 내외의 런닝 타임... 꽤 까다로운 조건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찾아보면 없으니, 영상 콘텐츠가 넘치는 이 시대에 뭔가 요상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