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 공개된 애니매이션 <나의 행복한 결혼>을 소설 형식으로 리뷰합니다. 명문가의 딸로 태어났지만 계모와 여동생에게 학대 받으며 살아왔던 미요가 남편인 키요카를 만나 어떻게 새로운 인생을 펼쳐가는지, 미요의 1인칭 시점으로 만나보겠습니다.
그날 밤, 출근했던 나리가 돌아왔다.
우리는 둘이서 같이 식사를 했다.
조용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안했다.
"낮에는 뭘 하면서 보내지?"
나리가 물었다.
"유리에씨에게 빌린 잡지도 읽고... 바느질도 해요."
"실은... 이번 휴일에 외출할까 하는데, 너도 가는 거다. 나와 함께."
나리의 말에 나는 무어라 대답할 수 없었다.
"여기 오고 나서 한 번도 시내에 나간 적 없어? 가고 싶지 않아?"
"저는... 못 갑니다. 볼일도 없을 뿐더러 폐를 끼칠 수는 없어요."
"폐가 될 것 없고, 볼일은 없어도 돼."
나리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을 이었다.
"기모노는 이곳에 온 날 입으면 될 것 같은데. 다른 걱정 거리가 있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같이 가는 거야."
그렇게 말하고 난 나리는 잘 먹었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시의 나는 나리의 마음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고, 첫 데이트는 그렇게 불현듯 결정되었다.
그날 아침은 어느 때 보다도 일찍 눈이 떠졌다.
외출 준비 때문인 것은 없었다.
나에게는 치장할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마음이 조금 들떴다.
하지만 그 마음은 다시 무겁게 가라 앉았다.
이곳에 온 첫 날 입었던 기모노를 입고 빗을 꺼내 들었다.
듬성 듬성 이 빠진 빗 사이로 머리카락이 빠져 나갔다.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문 밖에서 유리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유리에는 방문을 열고 들어와, 함박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유리에는 그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봐 주었다.
초라한 내 모습을 보고도 언제나.
"이 거울도 편하게 쓰세요."
유리에가 천을 걷어 내자, 나무 향이 짙에 나는 거울이 드러났다.
내 몸을 다 담아 내고도 남을 큰 거울이었다.
그 거울에 잔뜩 주눅 들어 있는 내 얼굴이 들어 있었다.
"화장을 할 줄 아나요?"
유리에가 물었다.
"아니요... 화장을 해 보지 않아서... 화장 도구도 없구요."
"그럼, 제게 맡겨 주세요."
유리에가 가지고 온 나무함을 열었다.
"제가 준비 했어요. 새로 나온 것들은 아니지만, 미요님에게 잘 어울리도록 해 보겠어요."
유리에 앞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그녀는 내 얼굴에 하얗고 고운 가루를 올려 곱게 펴 발라 주었다.
붉은 연지를 붓에 담아 칠해 주었고, 눈가를 분홍색 가루로 발라 물들여 주었다.
"다 됐어요."
유리에는 나를 큰 거울 앞으로 데려 갔다.
그곳에는, 생전 처음 본 것 같은 여자가 서 있었다.
바로, 나였다.
"어머, 너무 고우네요."
유리에가 내 모습을 칭찬해 주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는 나리 앞으로 걸었다.
나리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준비는 다 끝났나?"
나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리에는 서둘러 방문을 열고, 나를 밖으로 내 보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내 목소리에, 나리가 몸을 돌렸다.
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조금 눈이 커진 것 같았다. 아니, 그건 나의 착각인가.
"재촉해서 미안하군. 갈까?"
나리는 그 만큼이나 멋진 붉은 색 자동차 앞으로 나를 데려갔다.
"먼저, 직장으로 갈 거야."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럼 나리의 직장 사람들을 소개 받게 되려나? 뭐라고 말하지?
"긴장할 필요 없어. 시내에 나가기 전에, 주차하기 위해서야."
"아... 네..."
나리는 어떻게 내 생각을 빤히 아는 지 궁금했다.
그날, 날씨가 무척이나 좋았다.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았고, 바람 마저도 가볍게 흘렀다.
나리의 옆 자리에 앉아 운전하는 모습을 잠시 훔쳐 보기도 했다.
나리의 머리칼이 햇빛에 반짝였다.
금빛인 것 같기도 하고, 은빛인것 같기도 한 아름다운 머리칼이...
"여기야."
나리가 차를 세웠다.
여기가 나리의 직장인가...? 고풍스런 건물을 둘러 보았다.
당시 내가 나리에 대해 아는 전부는 나리의 이름과 직업 뿐이었다.
그의 직업은 이능이 있는 자들을 훈련시키는 장교였다.
언젠가 '그들'이 이 세상을 혼란에 빠뜨릴 때, 이능의 능력을 발휘해 막아낼 수 있도록...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장난끼 넘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리와는 전혀 다르게 생글 거리며 웃는 남자가 서 있었다.
"참견 마."
차가운 나리의 대답을 들었는지 마는지, 남자는 빙글 거리며 웃었다.
"그런데 이분은 누구십니까?"
"내 일행이다, 참견 마."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그의 칭찬에 두 빰이 붉어졌다. 이럴 때 뭐라고 대답을...
"참견하지 말라는 말 못 들었나? 오늘은 주차하러 왔을 뿐이니, 신경 쓰지 말고 할 일 하러 가."
"네, 네, 알겠습니다."
남자는 씨익 웃으며 걸어갔다.
걸어가다가 다시 뒤를 돌아 우리 편을 보기도 했다.
"내 부하인데, 고도라고 하지. 저래 봬도 이능력은 꽤 쓸만해."
"네, 그렇군요."
나리의 신임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부하인데도, 별 거리낌없이 나리에게 말을 걸고, 웃어보일 수 있다니...
그러보니 유리에도... 다 큰 나리를 '도련님'이라 부르며 친근하게 말을 건다.
언젠가 나도 친근하게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
"그만, 가지."
"네..."
나리와 함께 시내로 나갔다.
나리는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있느냐고 물었다. 혹시 갖고 싶은 건 없냐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뭘 갖고 싶은 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번에도 나리는 내 마음을 읽은 듯 말했다.
"뭘 갖고 싶은 지 모르겠다면, 우선은 내 물건을 사러 가지."
"네, 그래요."
마음이 편안해 졌다.
우리는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를 걸었다.
난생 처럼 보는 물건들도 있었다.
사람들의 걸음은 활기찼고,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물건들은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즐거운가?"
나리가 물었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보았네요."
나리의 손이 내 머리 위를 살포시 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폐가 될까봐 염려할 필요 없어. 함께 외출하자고 한 사람은 바로 나니까."
그러면서, 한눈 팔다가 길 잃지 말라고 말해 주었다.
"조심하겠습니다."
"훌륭해."
나리는 나와 발을 맞춰 걸어 주었다.
이 분의 어딜 봐서 냉혹하고 무자비하다는 걸까? 이렇게나 다정하신데...
나리는 나를 한 포목점으로 데려갔다.
왕실에 의복을 납품하기도 하는, 쿠도 가문이 오래전부터 애용해온 가게였다.
"어서오세요, 쿠도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포목점 주인은 유리에와는 다른 분위기의 여자였다.
60대 초반 쯤으로 보였는데, 깐깐해 보이지만 동시에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쿠도 님께도 드디어 이런 날이 오네요."
주인 여자는 씨익 웃으며 나리와 함께 안 쪽으로 들어갔다.
나는 주변을 서성이며, 나리와 주인 여자를 보았다.
나리는 주인 여자와 옷감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 같았다.
'아...'
벽에 기모노 한 벌이 걸려 있었다.
분홍빛 기모노... 벚꽃이 그려진... 기모노였다.
어머니가 입고 있었던 기모노와 꼭 같았다.
내가 가장 오래 기억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벚꽃 기모노를 입고, 벚나무 앞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
어머니를 보고, 반가워 달려가면 어머니는 웃으며 나를 바라보셨다.
내가 끝까지 달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는 품에 안기면 나를 꼭 안아 주었다.
그랬는데... 나를 안아 주던 어머니는 이 세상에 없고, 벚나무는 베어졌다.
오래된 기억은 이렇게 불쑥 불쑥 되살아난다. 아무때나 어떤 곳에서든지...
"아주 멋지게 준비해 놓겠습니다."
어느 새 나리와 주인 여자는 내 가까이 와 있었다.
주인 여자는 나를 보고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럼."
나리와 함께 포목점을 나왔다.
그 다음에는 제과점에서 빙수를 맛 보았다. 그는 차를 마셨다.
"맛은 어때?"
나리의 물은에 맛있다... 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맛있다는 표정이 아닌데?"
"아니에요, 맛있어요."
"넌 좀 처럼 웃지 않는 군."
"죄송합니다."
"아니, 나무란게 아니라 그저...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달까?"
"...... 나리께서는 별난 분이시네요."
"......"
"아, 죄송합니다. 제가 건방진 소리를..."
"화나지 않았어. 그러니 너무 위축되지마."
"하지만..."
"우리는... 이대로 가면 결혼할 거다. 그러니 마음을 터놓고 뭐든지 얘기 하도록 해. 나는 네가 솔직하게 말해 주는 게 좋아. 사죄가 아니라."
결혼할 사이...
그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다.
나리는 모르는 게 분명했다.
내게 이능이 없다는 걸... 언젠가 고백해야 할 텐데... 어쩌지...
나도 모르게 바라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내 앞에 앉아 있는 저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고.
나중에 얼마든지 어떤 벌이라도 받을 테니, 조금 만 더 있고 싶다고...
직접 마무릴 지을 그날까지만...
그날 밤, 목욕을 하고 나와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문 앞에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상자를 열어 보니, 새 빗이 들어 있었다.
작은 벚꽃잎 세 장이 그려져 있는 빗이었다.
나는 그 빗을 들고 당장 나리의 방으로 뛰어 갔다.
"이렇게 비싼 것은 받을 수 없어요!"
나리는 벌개진 내 얼굴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늘 듣던 목소리로 말했다.
"신경쓸 필요 없어. 아무튼 사양 말고 쓰도록 해."
그 순간에 나는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가 가장 원하는 말은 그런게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솔직하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나리. 소중히 아껴 쓰겠습니다."
아주 나중에 유리에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머리빗은 청혼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