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극(absurd drama)이라는 명칭은 연극 평론가 마틴 에슬린이 명명했다. 그는 그와 동시에 활동하는 극작가들의 작품 성향을 연구하고, 이른바 반리얼리즘 계열의 작품을 일컬어 부조리극이라고 칭했다. 여기서 '부조리'란 조리에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조리'란 합리와 비슷한 말로, '말이나 글 또는 일이나 행동에 앞뒤가 들어맞고 체계가 서는 갈피'를 뜻한다.
한편, '합리'란 '이론이나 이치에 합당함'을 가리킨다. 이 세상의 어떤 현상이나 상황은, 그에 알맞은 이유나 원칙이 있게 마련이며,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결과에 해당하는 지금의 상황이 벌어진다고 할 ㅅ 있다.
리얼리즘 연극은 이러한 원리, 원칙, 규칙, 상궤, 상식 등을 활용하여, 우리 사회와 현실에 내재하는 문제점 혹은 모순과 부조리를 파헤치고, 그 원인을 알려줌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이를 치유하거나 대안을 모색하도록 유도한다.
이와 반대로 부조리극 작가들은 이러한 통상적 절차를 거부한다. 그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현상들의 원인을 밝혀내기보다는 그 현상의 원인을 밝혀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피력하는 데에 주력한다. 또한, 논리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직관적이고 시적인 방법으로 상황을 전달하고자 하며, 우리가 처한 상황을 우리가 제대로 파악하는 일이 어렵다는 뜻을 전달하는 데에 더 적극적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는 부조리극 장르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통해 부조리극의 전형적 특징을 살펴보면...
연극이 시작되면 '고고'라 불리는 에스트라공이 구두를 벗으려고 한다. 발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구두는 아무리 벗으려고 해도 좀처럼 빠지지 않는다. 이때 블라디미르라고 불리는 '디디'가 들어온다. 두 사람은 밑도 끝도 없는 말싸움과 말장난을 시작한다. 그들의 대화는 조리에 맞지 않는다. 이 이야기를 했다가 저 이야기를 했다가, 화제가 계속 바뀐다.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처형되었다는 두 도둑에 대해 이야기할 때, 고고와 디디는 두 사람이 구원을 받았느니, 못 받았느니 하면서 운을 떼며 대화를 나누지만, 그 어느 것도 제대로 끝맺지 않는다. 그들의 대화는 파편적이고 우발적이다. 그래서 제대로 기억되지도 않는다.
리얼리즘 연극에서 대사는 사건을 발전시키고 인물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드는 중요한 전달수단이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전개되며 순차적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플롯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앞의 이야기와 뒤의 이야기가 서로 연결되어야 하며, 이러한 연결을 위해서는 논리적인 연쇄, 즉 인과관계가 강하게 보존되어야 한다.
하지만 고고와 디디의 대화는 파편적이고 우발적이어서 이러한 논리를 관계를 벗어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기에 럭키와 포조가 등장하면서 대화하는 사람은 네 사람으로 늘어난다. 이들의 대화 역시 제멋대로에 예측불허다. 서로 잘 아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처음 만난 사람처럼 굴기도 한다.
고고와 디디가 하루 종일 별로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 일을 하면서 기다리는 존재인 고도(godot)역시 정체불명의 인물이다. 계속해서 다른 곳으로 가자는 고고의 보챔에도 불구하고, 디디는 자신들이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관객들은 대화를 들으면서 고도가 실재하지 않는 인물일 수도 있다는 의구심을 품게 된다.
럭키와 포조가 퇴장하고 난 이후, 고도의 전령사 소년이 등장한다. 소년은 고도의 전갈을 가지고 온다. 이에 관객은 고도가 실재하는 인물 일 수도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고도는 텅 빈 기호처럼 상징성만 남아 있게 된다.
관객들은 이 상황이 50년 가까이 반복되었으며,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고고와 디디는 고도를 영원히 만날 수없으며, 매일 매일 소년에게 간접적인 전갈만을 받을 뿐이다. 이들의 시간은 고도를 기다리기 위한, 고도의 전갈을 가져오는 소년을 만나기 위한 때우기, 버팀이다. 이를 통해 관객은 이것인 인생이며, 고고와 디디의 모습은 자신들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전개 양상을 살펴보면, 부조리극 플롯의 특징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원형 플롯이라는 것이다. 원형 플롯에는 아무것도 변하는 것은 없고, 아무것도 해결되는 것은 없다는, 정체적인 사유가 숨어 있다.
부조리극의 언어는 소통 부재의 현실을 담아낸다. 물론, 이오네스크는 부조리극 작가들의 언어가 소통 부재, 혹은 소통 불가능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만 소통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부조리극 작가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목적은 상대에게 어떤 이유나 원리를 설명해서 상대로 하여금 상황을 이해하고 타인의 심정을 파악하도록 하는 데에 있지 않다.
그들에게 대화는 일방적이며, 그 어떤 효과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발산하는 넋두리에 가깝다고 해야 한다. 부조리극 작품을 읽거나 공연을 보는 사람들은 언어를 통해 무언가를 이해하기보다는, 언어가 불필요한 의사소통 수단이 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이 사회의 한 단면을 이해하게 된다. 즉, 언어가 우리가 믿었던 것만큼 절대적인 요소가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고나 할까.
마틴 에슬린은 부조리극 작가들이 일정한 연극 운동을 통해서 결성되고 동일한 작품을 쓰게 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부조리극이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갑작스럽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광대익살극, 난세스 문학, 꿈의 문학, 그리고 알레고리 전통이 부조리극의 맥락을 이루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또한, '낯설게 하기' 수법이 궁극적으로 부조리극과 관련이 있으며, 브레히트의 감정이입을 차단하는 방식도 부조리극의 정수 중에 하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부조리극이 낯선 연극이기 때문이다. 부조리극은 리얼리즘이라는 익숙하고 거대한 연극 사조에 반하는 사유를 표현하기 위해서 도전적으로 정립된 연극 사조이다. 익숙한 것을 익숙하지 않게 보이게 함으로써, 익숙한 언어를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함으로써, 익숙해져야 하는 인물을 끝까지 익숙하지 않은 인물로 내버려 둔다. 그리하여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과 낯선 인식을 알려주고자 한다. 낯선 형식은 낯선 인식을 낳고, 그 인식은 우리가 익숙하게 된 연극 사조를 근본적으로 전복시키는 힘을 낳았다. 비록 그 과정에서 인식 상의 난해함을 불러왔을지라도 말이다.
정보출처: 김남석 저, <연극의 역사와 스타일>, 연극과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