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쓰지만 정확한 개념을 정확히 모르는 말들이 있다.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 그리고 아방가르드. 누군가 어떤 작품을 향해 "참, 아방가르드 하네."라고 하면, 대충 그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눈치챌 수 있지만 "그래서 어떤 부분이 아방가르드 한대?" 하고는 잘 물어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아방가르드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질문을 받은 이가 "이런저런 점 때문에..."라고 말을 했을 때, "아하!"라고 대꾸 정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봐도 아방가르드에 대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글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럴 때는 역시나 개념서를 찾아봐야 하는데, 그 개념서라는 것은 대부분 너무나 지루하고, 복잡하여 차라리 모르고 말자, 하고 넘기게 된다.
노명우의 <아방가르드>는 그런 의미에서, 참 도움이 되는 책이다. 총 5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아방가르드의 시작부터 성공과 실패까지의 긴 여정을 다양한 예시와 함께 정리해 놓았다. 그리고 전체 책의 페이지 수가 130여 쪽 밖에 되지 않는다. 영화는 두 시간 정도, 연극과 뮤지컬은 100분, 책은 300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수준이래야 마음이 편해지는 나로서는 퍽이나 만족스러운 책이 아닐 수 없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도 쭉 읽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번에 읽을 수 있다면, 툭툭 끊어지던 맥락도 한 번에 쭉 꿰어 맞춰지니, 개념서로서는 완벽하지 않은가.
그럼, 책 소개는 이만 하기로 하고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아방가르드'에 관하여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1. 아방가르드의 시작
원래 군사 용어로 사용되었던 ‘아방가르드’가 점차 미학 용어로도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의 출현과 맞물려 있다. 이 운동이 전개되면서 아방가르드는 점차 20세기 초반에 나타난, 전통을 파괴하고 현대 예술의 새로운 경향을 앞서 보여준 예술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아방가르드 운동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것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20세기 초반의 정치 상황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19세기에 부르주아 지배가 확립되었다면, 20세기에 접어들면서는 부르주아의 지배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회적 움직임이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가 혁명을 통해 집권했고,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실험이 시작되었다. 러시아에서 시작된 혁명의 열기는 전 유럽으로 확산되어 1918년 독일에서도 러시아에서처럼 사회주의 혁명 운동이 절정에 도달했다. 19세기에 공세적이었던 부르주아는 20세기에 새롭게 건설한 부르주아 공화국을 사회주의 편에 맞서 지켜야 했다.
예술사에서도 정치사 못지않은 치열한 전투가 20세기 초반에 전개되었다. 예술은 19세기에 접어들어 자율성을 획득하면서 종교적 기능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목적 자체의 정당성을 획득했지만, 이내 위기를 맞이했다. 예를 들어 당시 등장한 사진술의 확대는 회화의 전통적인 기능에 의문을 제기했다.
새로운 ‘기술’은 19세기에 확립된 모든 미학적 기준을 뒤흔들어 놓았다. 독일의 철학자 벤야민도 기술의 도전으로 급격하게 바뀐 미학적 기준에 주목하여, ‘아우라의 붕괴’라는 개념을 통해 20세기 기술의 도전으로 인한 미학적 기준의 변화 필요성을 역설했다.
예술이 자율성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예술품의 가치는 진품 유무와 강력하게 결합하기 시작했다. 벤야민은 유일무이하고 반복될 수 없는 진품 예술품은 아우라를 지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급격히 확산된 복제 기술은 예술 작품의 이러한 19세 기적 아우라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19세기의 미학적 이상이 농축되어 있는 아우라의 붕괴야 말로 새로운 세기에 예술이 직면한 거대한 위험이었다.
이러한 위험에 직면한 예술이 선택할 수 있는 해결책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19세기에 확립된 미학적 기준을 더욱더 세련화 하고 강화하여 ‘기술’의 도전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방법은 현대의 기술과 충돌하는 19세기의 미학적 이상을 거부하고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이에 20세기 초 순수 예술에 대한 전통적 생각을 파괴하고 예술의 제도적 틀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련의 예술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아방가르드라 불렀다.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집단이 자신을 가리켜 ‘아방가르드’라는 호칭을 사용했다는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만 하더라도 아방가르드라는 말을 경멸적인 뜻으로 사용했다. 그는 아방가르드라는 개념을 이념적으로 급진적인 좌파 예술가들을 빈정대기 위해 사용했다.
하지만 아방가르드는 점차 부정적인 의미를 탈피해, 새로운 예술 운동을 가리키는 말로 변하기 시작했다. 아방가르드는 특정한 사조라기보다 19세기에 완성된 미학적 이상에 대한 안티테제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아방가르드는 집단 운동이었음에도 이 집단 운동이 펼쳐진 공간은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예술에 반대하는 방법 역시 다양했다. 아방가르드는 동일한 형태를 지니지도 않았고, 동일한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지도 않았지만 목표는 한결같았다. 20세기에 등장한 아방가르드로 지칭되는 집단에는 미래파, 표현주의자, 다다이스트, 초현실주의자, 데 스테일 등이 포함되었다. 이들의 유파적 경향은 상이했지만, 그 활동을 하나로 묶어 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은 1800년대 이후 정점에 달한 근대 예술을 둘러싼 관습과 제도의 보수주의를 문제 삼았고, 새로운 예술을 꿈꾸었다. 그들은 예술을 부정하고, 예술의 새로운 전망을 제시했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예술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방가르드는 19세기 확립된 미학의 기준을 반복할 때 발생하는 ‘권태’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권태는 어디에서 오는가? 아방가르드는 같은 것을 반복할 때 권태가 셍긴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반복을 강요하는 기존의 모든 예술은 따분하다고 생각했다. 예술이 무엇이며, 예술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관습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에 새로운 대답을 찾는 집단들은 자신들만의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이 선언문에는 관습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예술가들이 예견하는 미래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들은 선언문을 발표하고 관습이라는 적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이들에게 적이란 19세기의 낡은 미학적 기준을 옹호하는 제도, 기관, 기성의 예술가들이었다. 아방가르드로 자처하는 이 예술가들은 젊고 패기 있지만 사회적 영향력을 아직 획득하지 못한 무서운 아이들(enfants terrible)이었다. 이 ‘무서운 아이들’이 예술계를 뒤흔든 아방가르드 운동의 주인공이다.
2. 무서운 아이들의 도발
시각 예술 최초의 선언은 이탈리아의 미래파에서 시작되었다. 미래파를 선도한 마리네티는 1909년에 잡지 <피가로>에 ‘미래파 선언’을 발표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래파는 예술을 누르고 있던 전통주의 틀을 벗어던지고 무조건 새로움을 지향해야 한다고 여겼다. 미래파는 기술을 위험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미래파는 기술에서 진보와 가능성을 찾았고, 기술을 환영했다. 그들은 기계 문명을 비판하기는커녕 기계 문명 속에서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찾았고 대도시의 리듬을 찬양했다. 따라서 미래파는 전통 파괴와 미래 지향을 미학의 절대적인 원칙으로 여겼다. 또한, 미래파는 정치적으로 민감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도 무장되어 있었고, 예술만이 개혁이 아니라 예술과 함께 그리고 예술을 통한 사회 변화를 지향했다. 미래파는 사회를 향해 자신들의 ‘선언’을 전하고자 했다. 미래파가 자신들의 선언을 예술 전문 잡지가 아니라 <피가로>에 실은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수많은 예술가들이 전쟁을 피해 스위스 취리히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영세 중립국인 스위스는 전쟁의 포화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곳이었기에 예술가들이 취리히를 피신처로 선택한 것이다. 후고 발(Hugo ball) 역시 취리히로 이주한 예술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1915년에 ‘볼테르’라는 이름의 카바레를 열고 1916년에 ‘다다 선언’을 발표했다. 다다 선언은 이렇게 시작한다.
다다는 새로운 예술의 방향이다. 다다에서 사람들은 완전히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내일이 되면 취리히 곳곳에서 다다에 관해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발의 다다 선언 이후 볼테르는 완전히 새로운 예술의 방향에 공감하는 예술가들의 집합소가 되었고, 볼테르의 명성은 취리히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 이후 볼테르에 들락거리는 젊은이들에게는 다다라는 호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본거지 이름을 따서 <카바레 볼테르>라는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했고, 그 이후 이 잡지는 <다다 Dada>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다다’는 아무것도 뜻하지 않았다. ‘다다’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단어이다.
다다라는 이름이 어디서 유래했는지에 관해서는 다양한 해석들이 있다. 1918년의 다다 선언은 다다라는 기호의 유래를 이렇게 설명한다.
신문기사를 보면 크루족이라는 아프리카 흑인 종족이 신성하게 여기는 소의 꼬리를 '다다'라고 부른다. 장난감 목마나 보모를 부르는 단어도 다다이고, 러시아어와 루마니아어로 이중 긍정을 할 때도 역시 '다다'라고 한다.
다다라는 기호는 모호한 뜻을 지녔지만, 다다의 메시지는 매우 분명했다. 다다는 19세기에 확립된 미의 전통적 기준을 파괴하고 미래의 미적 기준을 제시하려 했다. 다다는 충격을 원했다. 다다는 전통적 예술과의 완전한 단절을 꿈꿨다. 다다는 19세기의 예술에 익숙해져 있는 관객들에게 충격을 주고자 했다.
한편, 1917년 2월 취리히를 떠나 베를린에 온 휠젠베크는 ‘볼테르’에서의 경험을 베를린의 아방가르드 운동과 접목하고자 했다. 그는 베를린으로 이주한 화가이자 시인인 하우스만과 의기투합했다. 1917년 5월, 휠젠베크는 아방가르드 잡지 <신청년>을 창간했다. 또한 취리히의 볼테르를 본떠 베를린에서 클럽 ‘다다’를 열었다. 그리하여 1918년 2월 노이만 갤러리에서 열린 예술가들의 저녁 모임에서 베를린 다다가 출범했고, 휠젠베크는 1918년 독일 다다 선언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1918년 여름부터 베를린 아방가르드 노선은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어떤 아방가르드보다 정치적 성향이 강한 베를린 특유의 아방가르드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그로스(George Gros)는 베를린 아방가르드의 정치 성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젊은이였다. 그는 독일을 움직이고 있는 사회 핵심 세력에 대한 분노와 거부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그로스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 중 하나인 <사회의 기둥>에는 베를린 아방가르드의 정치적 비판 의식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그로스는 당시 독일 사회를 풍자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에는 언론을 장악하기 위해 신문을 가슴에 품고 있는 알프레트 후겐베르크, 술에 취한 뚱뚱한 성직자, 머리에 똥이 가득한 사회민주당 국회의원, 귀족 정치주의자가 등장한다. 이 그림을 통해 당시 독일 사회는 우스운 모습으로 재현된다.
1914년 유럽이 세계대전에 휘말리자 구대륙의 수많은 예술가들이 뉴욕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마르셀 뒤샹을 비롯하여 만 레이, 프랜시스 피카비아가 뉴욕으로 이주한 대표적인 예술가들이었다.
뒤샹이 뉴욕으로 이주한 것은 1913년 2월 17일부터 3월 15일까지 뉴욕의 렉싱턴가 305번지에 있는 제69연대 병기창에서 열린 ‘국제 현대 미술 전시회’ 때문이었다. 이 전시회는 병기창에서 열렸기 때문에 아모리 쇼(Armory show)라는 별칭을 얻었다. 뒤샹은 아모리 쇼에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작품 2>를 출품했다. 그의 작품은 아모리 쇼 출품 작품 중 가장 조롱을 받은 작품이었다. 그러나 뒤샹의 작품이 던진 충격은 대단했다. 이 작품은 관객뿐만 아니라 미술평론가들에게도 논란거리가 되었다. 전통적인 회화에 익숙해 있는 사람에게 뒤샹의 이 그림과 그림 제목은 따로 노는 인상을 준다. 어떻게 이런 그림에 이러한 제목을 붙일 수 있을까?
뒤샹은 뉴욕에서 자신의 ‘반예술’ 적 예술관을 마음껏 펼쳐 보이는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1917년, 뒤샹의 유명한 변기가 출품된 독립미술가협회 전시회가 열렸다. 뒤샹은 이 전시회에 ‘리처드 머트’라는 이름으로 조각을 출품했다. 왜 뒤샹은 이름을 속이면서 변기를 출품했을까?
본래 이 전시는 아카데미가 주관하는 전시회와 달리 사전 심사를 요구하지 않았다. 출품료 6달러만 내면 누구나 이 전시에 작품을 보낼 수 있었다. 한 목격자는 뒤샹의 작품을 접수하고 나서 벌어진 에피소드를 이렇게 전한다.
‘에이 추잡해!’ 벨로즈가 나무 받침대 위에 뒤집어놓은 흰 변기에 질겁해 시선을 돌리며 외쳤다. ‘관점 나름이겠지요.’ 아렌스버그가 말했다. ‘우리는 이것을 전시할 수 없어요.’ ‘전시해야 합니다. 그가 6달러를 보내왔어요. 우리의 규약은 예술로 선택된 모든 것을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어요.
뉴욕에서 뒤샹이 행한 일련의 작업에서 우리는 그가 꿈꾸었던 도발의 목표를 짐작할 수 있다. 뒤샹은 ‘예술 작품’ 개념에 도전하고자 했다. 뒤샹의 목표는 ‘반예술 작품’을 지향하는 예술이었다. 그는 낡은 예술 작품에 또 다른 예술 작품을 대비함으로써 반예술에 도달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뒤샹은 낡은 예술에서 매우 중요했던 ‘작품’ 개념을 파괴하면서 오히려 삶이 예술에 가까워지는 미학적 전환을 기획했다.
뉴욕에서 시도된 뒤샹의 도발은 예술사의 중요한 사건이지만, 그곳은 뒤샹에게 만족스러운 환경이 아니었다. 뉴욕에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 뒤샹은 다시 대서양을 건너 또 다른 아방가르드 동지들이 모여 있는 도시, 파리로 떠났다.
파리에는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아방가르드 집단 말고도, 새로운 예술을 위한 전투 의식으로 무장한 아방가르드 집단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브르통, 엘뤼아르, 아라공 같은 급진주의적 시인들이 그들이다. 취리히에서 아방가르드 집단이 스스로를 ‘다다’라고 불렀다면 파리의 아방가르드는 스스로를 ‘초현실주의’라고 불렀다.
초현실주의는 예술 전통의 붕괴라는 다다의 반예술 이념을 공유했다. 초연실주의 집단에 속한 아방가르드 중 상당수는 다다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초현실주의와 다다 사이에는 섬세한 차이가 있다. 다다가 반예술에 치중했다면, 초현실주의는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가치를 모색했다.
초현실주의 그룹은 무의식을 발견한 프로이트를 통해 유럽의 오래된 전통인 이성주의에 반기를 들었고,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새로운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이상을 수용했다. 브르통은 1924년 10월 <초현실주의 선언>을 통해 낡은 예술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초현실주의 연구소’를 설립했고, 1924년 12월부터는 <초현실주의 혁명>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했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초현실주의를 이렇게 정의한다.
초현실주의 남성 명사. 마음의 순수한 자연환경으로서, 이것으로 인하여 사람이 입으로 말하든 붓으로 쓰든 또 다른 어떤 방법에 의해서든 간에 사고의 참된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 이것은 또 이성에 의한 어떠한 감독도 받지 않고 심미적인, 또는 윤리적인 관심을 완전히 떠나서 행하는 사고의 구술.
초현실주의의 트레이드 마크는 이른바 자동기술법이다. 자동기술법은 이성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작가가 자신을 외부 세계와 완전히 분리시킨 상태에서 생겨나는 모든 형태의 사고를 가능한 한 빨리 기술하는 방식이다. 브르통은 자동기술법이 의식의 스냅사진과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의식의 개입을 포기함으로써 19세기에 형성된 천재적 창조자라는 예술가의 지위를 벗어던지려 했다.
초현실주의는 전통에 대립하는 꿈과 상상력에 대한 선언이다. <초현실주의 선언>을 보면 초현실주의자들이 어떤 꿈을 꾸었는지 분명하게 나타난다. “아직도 나를 격동시키는 것은 오직 자유라는 말뿐이다”라는 브르통의 말처럼, 초현실주의는 무한한 자유에 대한 동경이었다.
아방가르드의 집결지로서 파리의 지위는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층 더 강화되었다. 1929년 뉴욕발 세계 대공황이 전 세계를 휩쓸자 파시즘의 징후가 1930년대 유럽 곳곳에 등장하고 있었다. 1930년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당은 독일에서 다수당이 되었다. 히틀러는 새로운 예술적 실험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히틀러는 전위적인 실험을 금지시켰다. 나치의 아방가르드 탄압은 1937년에 나치가 의도적으로 개최한 ‘퇴폐 미술전’에서 전정에 달했다. 이럴수록 더욱더 파리는 아방가르드 집단을 빨아들였다. 파리에서 시작된 초현실주의 운동은 아이러니하게도 유럽의 정치적 보수화와는 관계없이 세계적인 흐름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36년에는 초현실주의 전람회가 파리, 런던, 뉴욕에서 열렸고, 1939년부터는 초현실주의 운동이 남아메리카로 파급되어 1940년에 멕시코에서 전람회가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방가르드의 세계 수도인 파리까지 나치의 침략으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1940년 6월 14일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자 아방가르드는 다시 나치를 피해 여러 도시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