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가 최고로 즐겨 보는 콘텐츠는 '심야괴담회'다. 유튜브로 에피소드 하나씩 아껴보고 있는데, 이 세상에 이렇게 미스터리한 일이 많은가... 하고 놀라기도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담력도 길러졌다. 심야괴담회의 에피소드 중 가장 재밌게(?) 본 것 중 하나는 남자친구를 위해서 귀신과 싸웠던 여자의 이야기다. 귀신 보다 더 드세게 소리 지르면서 꺼지라고 말하니까 슬그머니 거울 속으로 사라지는 귀신... 패널 중 한 명이 귀신이 제일 무서워하는 건 인간의 정신력이라고 했다. 그 말 이후로 이상하게 용감해졌다.
'심야괴담회' 이전에도 나는 귀신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늘 몇 가지 궁금증이 있었다. 죽으면 일단 모두 귀신이 되는 것일까? 원귀와 귀신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아니, 그 보다 더 근원적인 물음. 그래서... 진짜 귀신은 있는 걸까?
그런 내 눈에, <처녀귀신>이라는 제목이 포착되었으니, 아니 읽을 수가 없었다. 이 책의 부제는 '조선시대 여인의 한과 복수'이다. 처녀귀신은 왜 하얀 소복을 입고 나타나는 것일까? 왜 장화와 홍련은 한을 풀기 위해서 자신을 죽게 한 사람을 찾아가 복수하지 않고, 왜 사또를 찾아가나?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이 혹시나 담겨 있을까 해서다.
이 책은 크게 여섯 가지 파트로 나뉘어 있다. 첫째, 조선 후기의 귀신 이야기를 읽는 방법. 둘째, 죽어서도 존경받는 남자 귀신, 현실을 통제하는 파수꾼. 셋째, 구천을 떠도는 여자 귀신, 생사의 경계에 선 난민. 넷째, 자살한 여자, 귀신이 되다. 다섯째, 원혼의 저주와 복수극. 여섯째, 판타지와 공포, 귀신 이야기의 건강성. 그리고 각 파트로 넘어가기 전에, 귀신과 관련된 키워드를 제시하는데, 지금 이곳에서 몇 가지 소개해 보고자 한다.
■ 한국 귀신의 패션 - 소복의 미니멀리즘
소복 입은 처녀귀신이 내뿜는 공포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낯익은 그 형상은 단순하기에 오히려 거듭 공포를 생산할 만한 강렬한 설득의 힘을 지녔다. 새하얀 처녀귀신의 복색은 한밤중에 타살된 흔적, 가족이 연루된 자살이라는 어둠의 정서와 대비된다. 소복은 여자가 잠잘 때 입는 속옷 차림, 무방비의 복색을 환기한다. 한편으로 처녀귀신의 소복은 입관과 매장의 장례 문화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 수익의 전형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화장이 아닌 매장 형식으로 신체를 보존하는 장례 문화를 택하는 한, 흰 옷은 사자의 전매특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조선시대 장례 문화에는 삼베로 만든 수의 대신 화려한 채색 의상으로 수의를 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흰색 수의가 일상화된 것은 근대 초기인 1910년대부터라고 한다.
처녀귀신의 하얀 소복은 곧 죽음의 얼굴, 억울함과 분노를 부각하기 위한 탈색된 배경 정도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장식과 채색을 배제한 간결한 배경으로는 소복의 흰색이 제격일 듯싶다. 더군다나 귀신담이 주목한 것은 귀신의 목소리이지 의상이 아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처녀귀신의 소복 차림은 죽음의 유니폼이라고 할 수 있다. 길게 흐트러진 헤어스타일은 돌보지 않은 상처와 소외를 상징하며 처녀라는 신분은 응분의 보호를 받지 못한 자에 대한 죄책감, 지켜야 할 성스러움에 대한 배반의 감정을 환기시킨다. 다시 말해 소복은 차마 보호하지 못한 처녀의 신체와 내면, 어둠과 의혹을 부각하는 일종의 문화 기호다.
■ 장화홍련
장화와 홍련은 한국사의 트라우마다. 계모의 박해, 구경꾼 이복동생, 아버지의 방관과 오해로 연못에 빠져 죽은 장화와 홍련이 귀신이 되는 이야기는 가정조차도 안전지대가 될 수 없었던 처녀들의 삶, 딸들의 수난사를 대변하는 한국적 문화기호가 되었다. 한국 영화사에서도 장화와 홍련은 공포의 상징으로 통한다. 1924년 제작된 김영환 감독의 <장화홍련전>을 시작으로, 1936년, 1956년, 1972년에 각각 영화로 만들어졌다. 여기에 원작과는 무관하지만 가족사 비극을 공포의 심상으로 원용한 2003년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에 이르기까지 장화와 홍련이 귀신이 되는 내력담은 한국 영화의 대표적인 공포물로 자리 잡았다.
공포의 발원지가 가정이고, 자살을 종용한 사람이 아버지이며, 모종의 가족적 음모가 연루되었다는 점에서 장화와 홍련의 이야기는 비밀스러운 가족사 비극을 공포의 정서로 투명하게 감싸 안아 드러내는
상상의 출구를 마련해 놓았다.
고소설이든 영화든 '장화홍련'을 내세운 비극은 혈연으로 맺어진 양부모 가족의 스위트 홈이란 환상적 로망을 부추긴다. 동시에 양부모 가족을 '정상 가족'의 전형으로 여기는 한국사회의 문화적 강박증을 보여주면서 '사악한 계모와 착한 전실 딸'의 비틀린 대결 구도를 통해 가족제도의 모순을
'여자들의 문제'로 협소화시키는 문화적 왜곡을 강화한다.
고전소설 <장화홍련전>이 환기하는 공포는 귀신이 되어 나타난 두 딸의 혼령을 목도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더 큰 충격을 안겨주는 공포스러운 장면은 오히려 '사필귀정'과 '인과응보'의 고전소설 문법에 충실한 후일담에 있다. 억울하게 죽은 장화와 홍련이 아버지와 셋째 부인 사이에서 쌍둥이로 환생한 것이다.
생물학적 혈연 가족의 희생물이었던 장화와 홍련이 결국은 또 다른 혈연 가족의 일원이 된다는 발상 자체가
모순처럼 보인다.
오직 혈연으로 맺어진 양부모 가족이 '정상'이라고 믿고, 이를 갈망하는 마음, 그러한 인식이 존재하는 한, <장화홍련전>이 함축하는 가족사 비극과 공포는 사라지지 않는다.
귀신 이야기는 음파가 잡히지 않는 어두운 내면에 달아 놓은 문학적 확성기와 같다. 살아서는 할 수 없었던 말이 문학적 사상력의 힘으로 태어난 귀신 이야기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물론, 이야기 속에서라도 사회의 모순을 뼈아프게 들추는 진실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바로 이 '불편함;이 귀신 이야기가 형성한느 공포의 요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형성된 공포는 당대 사회의 건강성을 반영하는 지표가 된다. 그것이 화들짝 놀라는 단발성 공포의 형식일지라도, 전율이 발생하는 바로 그 순간만큼은 사회의 그늘을 들추는 불편한 진실과 목도하게 되기 때문이다.